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림-학림 논쟁 (문단 편집) === 노학연계의 문을 연 학림 === 또 5.18 민주화운동 당시 예상치 못했던 대중의 에너지와 이에 따른 참혹한 진압은 운동권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에 무림은 5.18을 "제어되지 못한 군중의 힘이 좌절된 것"이라 판단하여 패배로 파악했다. 또 학생운동의 우선적 과제를 "시위를 삼가고 조직된 기존 역량을 보존하는 것"으로 설정하였다. 반면 기만적 개량을 경계하던 학림은 5.18을 새로운 투쟁을 향한 귀중한 자산이요, 발판으로 이해했다. 이는 대중의 정치적 울분과 반항적 분위기가 고조된 향상적 정치위기의 연속, 이것이 새 정권의 운명이라 파악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과감하고 집요한 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전위적 전투조직을 학생/노동운동에서 건설하는 게 시급한 과제로 받아들여졌다. 무림 일변도였던 운동권의 많은 학생들이 학림 노선에 서서히 동조하게 되자 무학논쟁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즉, 본격적인 정파투쟁. 그러니까 노선의 차이에 의한 정파투쟁이 성립했던 것이다. 이들은 당시 '전국민주노동자연맹'을 준비해 오던 이태복의 영향을 받아 '전국민주학생연맹'을 결성했다. 한편 무림은 내부의 동요를 막기 위해 "시위를 자제하고 조직 역량을 보존하여야 한다는 우리의 주장은 구속과 처벌이 두려운 것 때문이 아니다"라는 점을 스스로 증명하여야만 했다. 그렇게 하여 그해 12월 11일 서울대생들이 학생식당과 도서관 앞에서 <반파쇼 학생 투쟁 선언문>을 공개 살포하다가 9명이 구속되었고 이후 80여 명이 연행되기까지 하였다(무림 사건). 이런 식으로 공안 당국은 무림조직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는데 8월 중순에 신문지상에 발표된 5.18 피검자 공소장에 무림 조직원들의 실명이 모두 거론된 점도 그러하다. 이런 무림의 '조직 보전론'은 이러한 조직보안의 위기의식에서 나온 것이지만 '우리 조직 및 우리 조직의 노선이 계속 주도권을 잡아야 된다'는 입장이 전제가 되었기 때문에 정파투쟁으로 번진 것이다. 반면 학림은 (특히 서울대의 경우) '무림으로부터의 개종자'들로 이루어졌으며 수배 중이던 무림 조직원들을 동원해 1981년 봄 학기에 서울대 시위를 주도했다. 또 이 기간에 전국적으로 약 20여 건의 학원시위를 만들어냈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노동현장 예비팀을 만들어 노동현장에 있는 선배와도 연계시키는 작업을 시도한 것도 있었다는 점이다. 어쨌건 이들 역시 그해 6~8월에 걸쳐 5공 정권에 의해 집중수사를 받아 학림 쪽 관련자 12명이 구속되어 [[학림 사건]], [[부림 사건]]까지 이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